헌혈 급감에 필수의료 붕괴 도미노…'면역글로불린' 품귀

서울대병원 "이대로면 환자 생명 위험해질 수도"…정부, 8일 관련부처 회의 열어 대책 논의

 소아·중환자 치료에 꼭 필요한 혈액제제인 '면역글로불린'이 전국 병원에서 품귀 현상을 빚으면서 필수 의료 시스템 붕괴 우려를 키우고 있다.

 면역글로불린은 외부 침입에 반응해 혈액의 백혈구에서 생성되는 단백질을 말한다. 체내 면역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항원(침입자)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항체 작용을 한다.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효과가 탁월해 자가면역 뇌염과 소아의 가와사키병, 이식 환자의 거부반응, 길랭-바레 증후군, 면역결핍 환자 치료 등에 널리 사용된다. 이들 환자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의약품인 셈이다.

 의료계에 따르면 8일 현재 이 의약품은 전국 대부분의 병원에서 재고가 거의 바닥날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중증 환자들이 많은 서울대병원조차 최근 품귀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재고량을 늘렸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병원 측의 설명이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이순태 교수는 "면역글로불린은 질병 항체를 분해해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효과가 탁월하기 때문에 대체 불가한 약물"이라며 "약의 효과가 사라지는 반감기가 1개월 정도여서 매달 주사를 맞아야 하는 환자들이 많은 만큼 주사를 맞지 못하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환자들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은병욱 소아청소년과학회 보험이사는 "대학병원의 경우 필요한 양이 100이라면 지금 50 정도만 공급되고 있고, 어린이 환자만 진료하는 병원은 현재 공급이 거의 끊어진 것으로 보면 된다"면서 "특히 소아 가와사키병의 경우 대체 치료제도 없어 꼭 필요한 환자한테만 (면역글로불린을) 아껴 써야 하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왜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한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국내 헌혈 현황과 면역글로불린 생산 시스템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보건기구(WHO) 협약에 따라 혈액을 팔고 사는 매혈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국내에서 환자 치료에 필요한 혈액은 국내 헌혈량만으로 충족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국내 헌혈량은 급감하는 추세다. 제약업체가 면역글로불린을 만들려면 혈액 속 혈장이 있어야 하는데, 국내 혈장 자급률은 2015년 90%에서 지난해 43%로 뚝 떨어졌다.

 이 때문에 부족한 혈장(57%)은 매혈이 가능한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코로나19 이후 원료 혈장 가격을 계속 올리고 있다. 2018년 ℓ당 13만1천원이었던 미국산 혈장 가격은 지난해 19만1천원으로 크게 오른 데 이어 올해는 20만원 이상을 호가하고 있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대한적십자사가 공급하는 국내산 혈장 가격(11만4천원)의 곱절에 달하는 미국산을 수입해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것이 면역글로불린의 국내 공급량이 급감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국내 제약사가 병원에 공급하는 면역글로불린의 가격은 50㎖(5%), 200㎖(10%) 제품이 각각 6만원대, 42만원대이지만, 외국에서는 이보다 5배 이상의 가격이 형성돼 있다.

 면역글로불린을 만드는 제약사들이 국내 수급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수출에 주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부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최근 제조업체의 의견을 수렴한 데 이어 8일 오후 2시에는 관련 정부 기관인 복지부, 식약처, 적십자사, 심평원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 마련을 논의할 예정이다.

 기본적으로 국내 헌혈량이 늘어나야 혈장 공급 단가를 맞추고, 면역글로불린 생산량 증가로 이어질 수 있지만 헌혈량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 상황에서는 제약사의 요구대로 공급 가격을 올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면역글로불린 가격을 현재보다 1.5배 올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식약처 관계자는 "이미 몇개월 전부터 면역글로불린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해 보건복지부, 심평원 등의 유관 부처와 협의 중이지만 현재로선 공급량을 되돌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단기적으로는 공급가격 인상과 미국 외 해외 공급망 추가 등을 검토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 국내 헌혈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헌혈을 늘리려면 우선 고교생 헌혈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규 교육 과정에 포함된 헌혈만 대입 생활기록부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한 대입 공정성 강화 정책이 시행된 이후 절반으로 급감한 고교생들의 헌혈을 다시 늘릴 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 광우병'으로 불리는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vCJD)에 대한 과도한 우려로 영국에서 1개월 이상(1980~1996년) 또는 3개월 이상(1997년~현재), 유럽 국가에서 도합 5년을 각각 체류하면 헌혈을 못 하도록 하거나 이미 헌혈한 혈액마저 폐기토록 한 규정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 규정 때문에 박지성, 기성용, 손흥민 선수 등은 국내에서 평생 헌혈을 할 수 없다.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상황에서 65세 이상 연령의 헌혈 조건을 '60∼64세 사이 헌혈 경험' 등으로 제한한 부분도 이제는 본인의 의사결정이 존중될 수 있도록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물론 더욱 중요한 것은 헌혈에 대한 국민인식 개선이다. 급감하는 헌혈로 인한 필수 의료 위기에 안타까워만 하기보다는 국민 스스로 헌혈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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