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돌봄' 할머니의 건강 역설…"노쇠 위험 22% 낮았다"

노인 8천여명 14년 추적…"신체·정서적 활력에 되레 신체기능 저하 늦춰"

 초고령사회 속 한국 할머니의 하루는 손주 돌봄으로 시작해 손주 돌봄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린이집 등·하원, 밥 챙기기, 놀아주기, 재우기까지 손주 양육의 한 축을 묵묵히 떠안으며 '제2의 육아'를 살아내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족을 위한 헌신으로만 여겨졌던 손주 돌봄이 오히려 할머니들의 '노쇠'(frailty) 발생을 낮추는 건강 자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여기서 노쇠는 일반적인 노화와 달리 신체 기능이 급격히 허약해져 장애나 입원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손주를 돌보는 노인이 빠르게 늘어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연구는 노인들을 손주 돌봄 그룹(431명, 평균 나이 62.7세)과 비돌봄 그룹(8천31명, 평균 나이 59.5세)으로 나눠 나이, 성별, 체질량지수, 만성질환, 소득, 흡연·음주 등 건강 관련 요인을 모두 보정한 뒤 노쇠 위험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손주 돌봄 그룹의 경우 75.4%가 여성 노인이었다.

 연구 결과 손주를 돌보는 여성 노인의 노쇠 발생 위험은 손주를 돌보지 않는 그룹에 견줘 22%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 노인도 같은 비교 조건에서 노쇠 발생 위험이 18% 낮았지만, 통계적 유의성은 떨어졌다.

 연구팀은 "손주 돌봄이 한국의 여성 노인에게 삶의 의미와 역할, 일상 활동 등을 제공함으로써 신체·정서적 활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감정이 노년기 심리 건강에 버팀목이 되고, 통원·식사 준비·놀이 등이 자연스럽게 걷기와 움직임을 증가시켜 근력 유지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주목되는 건 탈진, 악력저하와 함께 노쇠를 구성하는 3대 구성요소로 꼽히는 '사회적 고립'이 돌봄 제공 여성에게서 유의하게 낮았다는 점이다.

 손주와의 상호작용, 자녀 세대와의 접촉이 일상적으로 유지되면서 정서적 연결과 활동성이 유지되고, 이는 결국 신체 기능 저하를 늦추는 완충작용 역할로 이어졌다는 게 연구팀의 해석이다.

 연구팀은 "문화적으로 할머니가 주 양육을 맡는 한국의 가정 구조가 돌봄을 일상적 사회활동으로 기능하게 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연구팀은 돌봄이 항상 긍정적 결과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돌봄 시간이 과도하거나, 원하지 않는 돌봄을 의무감으로 떠맡는 경우에는 신체 피로와 스트레스가 증가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세의대 예방의학과 박유진 교수는 "한국에서 손주 돌봄은 이제 단순한 가족 보조 기능을 넘어, 노년 건강의 중요한 변수로 부상했다"면서 "정서적 보람과 신체적 활동이 결합한 손주 돌봄이 적당한 범위 안에서 제공될 때 노년의 몸을 지키는 새로운 건강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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