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에서 '약 끊고 건강 유지'…만성백혈병의 반전 드라마

  '백혈병'이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불치병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봤던 비운의 백혈병 환자 스토리가 각인된 탓이 크다.

 하지만 이제 이런 인식은 과거의 이야기다.

 백혈병은 우리 몸에서 백혈구·적혈구·혈소판 등의 혈액세포가 만들어지는 골수(뼛속 조직)에 비정상 세포가 지나치게 많이 증식하는 질환을 말한다.

 쉽게 말해 핏속에 쓸모없는 백혈구가 너무 많아져서 정상 피가 부족해지고, 면역력도 떨어지는 것이다.

 이중 만성골수성백혈병의 경우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잦은 입원 치료와 항암 주사 치료, 동종 조혈모세포 이식법 등에도 3∼5년 장기 생존율이 불과 30∼40%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1년 '글리벡(이매티닙)의 등장은 치료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글리벡은 9번 염색체와 22번 염색체의 일부가 서로 자리바꿈한 '필라델피아 염색체'라는 특정 유전자 이상을 정확히 겨냥하는 세계 최초의 표적치료제다.

 환자들은 매일 알약 한 알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10년 이상 생존율이 80∼90%를 넘어섰다. 고혈압이나 당뇨병처럼 관리할 수 있는 만성질환으로 탈바꿈한 셈이다.

 이후 전 세계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단체는 2011년부터 필라델피아 염색체의 번호를 딴 9월 22일을 '세계 만성골수성백혈병(CML)의 날'로 정해 궁극적인 질병 퇴치를 염원하고 있다.

 한때 '죽음의 병'으로 불리던 백혈병이지만, 표적치료제의 등장 이후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이제는 환자의 일상 회복과 삶의 질 향상까지 논의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최근에는 만성골수성백혈병에 더 효과적인 약물이 개발되면서 치료 후 추가적인 약물 없이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무치료 관해'(TFR, Treatment-Free Remission)로의 전환이 현실적인 목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지난 7월 국제학술지 '백혈병'(Leukemia)에 발표된 '유럽백혈병네트워크(ELN) 가이드라인' 5차 개정안은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준다.

 전 세계 45개국 220여개 기관이 참여한 이번 개정안은 충분한 치료 반응을 얻은 환자라면, 약물 복용을 중단한 상태에서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무치료 관해를 새로운 치료 목표로 제시했다.

 이는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이 표적항암제의 부작용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95% 이상은 표적항암제 치료 중 한 번 이상 부작용을 겪고, 최소 50% 이상의 환자는 1회 이상 치료중단을 경험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유럽백혈병네트워크 창립자인 뢰디거 헬만 교수와 김동욱 을지대의료원 혈액내과 교수. [김동욱 교수 제공]

 개정안은 특히 정량화된 지표만으로 치료를 결정하던 기존 틀에서 벗어나 환자의 나이·동반질환·내약성 등 개별 상황을 반영하는 맞춤형 치료를 강조했다.

 예컨대 임신을 계획하는 젊은 환자, 장기간 부작용에 시달리는 고령 환자 등의 다양한 사례에 맞춰 치료 가이드라인을 유연화한 것이다.

 국제가이드라인 제정에 패널로 참여한 김동욱 을지대의료원 혈액내과 교수는 "국내 3천100명 이상의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들의 치료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현재까지 88%의 생존율을 보이고 있다"면서 "이들 중 절반 이상의 환자가 표적항암제 중단이 가능한 '완전 유전자 반응'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번 가이드라인은 그동안 1∼4세대에 이르는 치료제의 혁신적인 개발과 25년 이상의 축적한 임상 경험, 그리고 계속 이어지고 있는 후속 연구의 진행 상황을 모두 반영했다"고 덧붙였다.

 보건의료빅데이터개방시스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으로 치료받고 있는 환자는 2021년 기준으로 7천908명이다. 연령대별로는 50대(23.9%), 60대(23.6%), 40대(17.6%), 70대(15.7%) 순으로 50대 이상이 전체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다만 이 같은 치료율 향상에도 불구하고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15∼20%가 여전히 치료에 실패해 장기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점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새로운 메커니즘의 약물 개발과 임상 연구가 꾸준히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유럽백혈병네트워크 창립자인 뢰디거 헬만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최근 한국 심포지엄에서 "만성골수성백혈병 환자의 생존 연장이 가능해진 만큼 환자의 사회생활, 임신·출산 등 진정한 의미의 일상 회복이 중요하다"면서 "국제 협력을 통해 환자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연구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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