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엄융의의 'K-건강법'…주치의 없는 대한민국

 ◇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문제점

 특히 이 조사에서 의사는 25년간 줄곧 신뢰도 1위를 차지했다.

 의사와 간호사에 대한 신뢰도가 특히 높은데 왜 그럴까?

 영국은 의료보건 제도가 국유화돼있어서 그럴 것이다.

 의사, 간호사는 모두 정부에서 월급을 받는다. 물론 고정 급여는 아니고 환자 몇 명을 더 진료하면 그에 대한 인센티브가 나오지만, 많이 벌어봐야 세금으로 나가기 때문에 영국 의사들은 환자를 지나치게 많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에 20여 명을 진찰한다.

 반면 한국의 대학병원 의사는 하루에 200여 명의 환자를 받는다.

 하루 8시간 동안 근무한다고 가정하면 총 480여 분 소요되는데, 이걸 200명으로 나누면 한 사람당 2.4분이 된다.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한 환자와 2분 이상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의사에게는 이러쿵저러쿵 환자의 상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도 한국 의사에게는 그게 불가능하다.

 의료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의 의사는 환자와 연결돼있지 않다.

 건강에 대해서 의사와 상의하고 싶어도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동네병원에 1차 진료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의사와의 상담이 보편화돼 있지 않다.

 또 다수의 환자가 대학 병원 같은 3차 병원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의사가 환자를 2분 이상 진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상담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성행하는 것이 바로 '호스피탈 쇼핑'이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저 이런 병 아닌가요?' 하고 묻고 검사 결과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다른 병원에 가서 묻는다.

 건강에 관해 관심은 많은데 전문가와 상의할 기회가 없으니 TV나 인터넷 같은 매체를 통해 엉뚱한 정보를 얻어 와서는 본인이 생각한 치료법은 이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 국민은 의료보험 덕분에 의료비를 적게 지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호주머니에서 불필요하게 나가는 돈은 상당한 수준이 된다.

 우리 국민은 자신이 부담한 비용에 비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환자 본인이 알아서 해야 하는 시스템이다.

 경쟁적으로 검사하고 기계적으로 진단하고 반드시 약물 치료를 하는 이런 문제를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해결할 방안이 없다.

 각종 매체에서 무슨 병에 좋고 어디에 좋다고 소개하는 음식도 너무 많다.

 현재 우리의 현실을 보면 질병의 예방이나 건강의 유지 등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인 건강권이 없다.

 병에 걸렸을 때만 의사한테 가서 진료받고 보험공단에서 경비를 지출할 수 있을 뿐이다.

 미래 의학은 세부 장기나 부분 중심의 의학, 현대 의학과 전통 의학이 구분된 의학, 고도로 전문화된 의학 중심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전인적 통합 의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이 특정 약이나 치료법의 효과가 얼마나 좋은가에서 얼마나 안전한가 하는 데로 옮겨가야 한다.

 또, 약보다는 음식과 운동, 생활 습관, 스트레스 관리 등으로 상황을 극복하거나 개선해야 한다.

 한 가지 음식이나 한 가지 치료법보다는 복합적인 생각에 근거한 생활방식 개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결국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경우 건강을 위해서 약을 쓰는 것보다 음식이나 운동으로 조절하는 게 낫다.

 예를 들어 당뇨병 초기에는 약보다는 음식과 운동으로 혈당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의료보험 제도의 문제 때문에 의사는 쉬이 그런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환자 역시 약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필자로서는 참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건강한 사회의 밑바탕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인구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어쩌다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됐을까?

 이 질문에는 여러 답을 내릴 수 있겠지만, 하나의 실마리는 교육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교육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런 교육제도가 사람들의 인식에도 큰 영향을 미쳐 결국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영국 교육의 특징은 다양성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공립과 사립학교가 나란히 운영되고 있고, 유명 사립학교들이 많지만 그만큼 유명 공립학교도 많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학과목을 가르치긴 하나 학생의 특성과 자질을 계발하기 위한 노력을 다양하게 하고 있다는 점도 특징이다.

 의무교육 기간이 끝나는 만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대다수 학생은 직업학교나 다른 진로를 선택한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에이 레벨'(A-level)이라고 하는 과정을 2년 더 공부해야 한다.

 보통 3∼4개의 과목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공부하는데, 문과·이과의 구분은 없고 우리 식의 암기 위주의 공부가 아니기에 우리나라 학생들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이 과목에 대해 시험을 치러 그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한다.

 우리 교육제도와 다른 점은 성적이 나오기 전에 예상 점수를 가지고 원하는 대학에 가서 면접을 본다는 것이다.

 지원자 모두가 면접을 보는 것은 아니고, 대학에서 심사해 통과한 사람에게만 면접 기회를 주는데 유명 대학에서 면접 허가만 받아도 학생들은 마치 합격한 것처럼 좋아한다.

 대학에서는 면접 때 학생의 자질, 포부, 동기를 다양하게 파악해 합격, 불합격을 통보한다.

 합격했다고 해도 대개는 조건부 입학 허가다.

 예를 들어 세 과목 성적이 모두 A가 나오면 합격시켜주겠다는 조건이다.

 면접을 통과하는 학생은 많지 않고, 대다수는 면접에 불합격해서 또 다른 대학에 가서 다시 면접시험을 본다. 조건부 합격을 받은 학생도 성적이 조건에 미치지 못하면 낙방한다.

 예상 성적이 모두 A여도 면접에서 불합격하는 경우가 꽤 있다.

 학부모가 항의해도 대학에서 '그 학생은 우리 대학이 원하는 학생이 아닙니다' 하면 끝난다.

 학생 선발은 대학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독립하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 질문을 없애는 교육, 상상력을 키우지 않는 교육, 적성과 상관없이 의대를 최고로 치는 교육이 됐다.

 이른바 '강남 8학군'이라는 교육 특구가 생겨난 것도 모두 기형적인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 때문이다.

 우리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고 그러려면 교육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교육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스스로 진로를 탐색하게 이끌어줘야 하며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가를 찾도록 이끌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교육의 다양성이 충분히 보장돼야 한다. 자기를 절제하고 남을 배려하며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목적으로 영국은 기숙사 생활과 그룹 스포츠를 적극 권장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민주적인 사회란 기능의 평등, 소득의 평등이 아닌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다.

 하지만 일부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기도 한다.

 학교는 상상력이나 창의력을 키워주는 게 아니라 암기 위주의 획일적인 답안만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현실을 생각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판단하며,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사회에 살게 됐다.

 세대 간, 지역 간, 빈부 간 큰 격차를 만들어 사회적 건강이 요원한 불건전한 사회가 돼가고 있다.

 '사회적 건강'은 필연적으로 개인의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한국은 전 세계에서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인구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된 건 아닐까?

 엄융의 서울의대 명예교수

 ▲ 서울의대 생리학교실 교수 역임. ▲ 영국 옥스퍼드의대 연구원·영국생리학회 회원. ▲ 세계생리학회(International Union of Physiological Sciences) 심혈관 분과 위원장. ▲ 유럽 생리학회지 '플뤼거스 아히프' 부편집장(현)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정회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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