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즈 바이러스, 완전 정복의 길 열렸다

동면(冬眠) 바이러스 잡는 '면역 경보' 시스템 발견
미국 워싱턴 의대 연구진, 저널 '사이언스'에 논문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 바이러스(HIV)에 감염되면 사형 선고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의 에이즈는 그렇게 치명적인 병이 아니다.

 특히 항HIV 제제를 3개 이상 한 번에 투여하는 HAART 요법이 등장하면서 HIV 감염자의 생명 예후(life expectancy)는 거의 비감염자와 비슷할 정도로 개선됐다.

 하지만 HIV 양성은 음성과 큰 차이가 있다.

 감염자는 먼저 항 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하루라도 이를 소홀히 하면 잠복했던 HIV가 다시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한테 바이러스를 옮기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에이즈에 투여하는 항 레트로바이러스 제제는 체내로 들어온 바이러스의 복제와 증식을 차단하면서도 감염까지 막지는 못한다.

 면역세포 안에 깊숙이 숨어 동면하는 에이즈 바이러스의 재활성화와 감염을 원천 봉쇄하는 치료 경로가 밝혀졌다.

 인간의 면역세포는 특정 HIV 단백질의 초기 활성화를 감지하는 경보 체계를 갖고 있었다.

 미국 워싱턴대 의대의 산 량(Liang Shan) 조교수 연구팀은 4일(현지 시각)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HIV는 CD4+ T세포(도움 T세포)에 감염해 면역 결핍을 유발한다.

 이 감염이 성립하려면 HIV의 'gp 120'이라는 당단백질이 CD4 분자와 먼저 결합해야 한다.

 HIV에 감염된 CD4 양성 T세포는 바이러스의 과도한 증식이나 킬러 T세포의 공격으로 결국 죽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말초 혈액의 CD4와 CD8 수치가 떨어지면 세포면역이 급격히 저하된다.

 세포면역은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를 킬러 세포가 통째로 죽이는 걸 말하며, 혈액에 들어오기 전에 바이러스를 공격하는 국소면역이나 혈액에 침입한 바이러스를 항체로 공격하는 체액면역과 구분된다.

 사실 동면 상태로 숨은 HIV를 뿌리 뽑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HIV는 매우 빠른 속도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면역 공격을 피하기 때문이다.

 HIV의 변이는 현란하게 외모를 바뀌는 스파이의 변장술과 흡사해, 인간의 면역계가 추적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번 연구의 최대 성과는 HIV의 변장술을 깨는 면역 기제를 발견한 것이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감염자의 비활성 은닉 바이러스를 일소할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이 치료에 성공하면 HIV 양성 보균자가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

 HIV는 입자 복제와 확산에 HIV 프로테아제(단백질 분해 효소)가 꼭 필요하다.

 그런데 인체 면역세포가 이 효소의 활성화를 감지한다는 게 이번에 확인됐다.

 바이러스를 직접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그 대신 바이러스의 움직임을 추적한다고 한다.

 연구팀은 면역세포 안에서 경보처럼 작용하는 CARD8이라는 염증 조절복합체도 찾아냈다.

 CARD8은 활성화된 HIV 프로테아제를 포착해 감염 세포의 자멸사(프로그램 세포사)를 유도했다.

 문제는 HIV 프로테아제가 활성화되지 않아도 HIV는 세포 안에서 오래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HIV 프로테아제는 감염 세포 안에서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다가 바이러스가 감염 세포를 벗어날 때 활성화된다.

 연구팀은 1990년대부터 에이즈 치료에 사용돼 온 NNRTI(비 핵산 역전사효소 억제제) 계열의 약이 HIV 프로테아제의 조기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걸 알아냈다.

 하지만 NNRTI는 바이러스가 동면에서 깨어나야 이런 효과는 낸다.

 항 HIV제를 투여하면 바이러스가 동면 상태로 숨기 때문에 NNRTI를 동시에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동면 상태의 HIV를 먼저 깨운 뒤 NNRTI를 투여하는 임상시험을 검토하고 있다.

 산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동면 HIV를 근절하는 약제 개발의 가이드를 제시했다"라면서 "저용량만 써도 NNRTI보다 좋은 효과를 내는 화합물을 발굴하거나 개발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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